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 (문단 편집) === 지지부진한 전쟁 === 1217년 4월, 거란군 5천여 명이 개성 바로 북쪽인 금교역에 이르렀다. 이에 고려 조정은 5군을 새로 편성해 상장군 오응부를 중군병마사, 최원세를 전군병마사, 공천원을 좌군병마사, 오인영을 우군병마사, 유돈식을 후군병마사로 삼았다. 거란군이 최충헌의 고향인 우봉현을 약탈하고 남하해 [[교주도]](현 [[강원도]] [[영서]]) [[철원]]을 함락시킨 뒤 [[원주]]와 [[충주]]를 장악해 약탈과 살상을 일삼자, 조정은 재차 5군을 투입해 이들을 토벌하게 했다. 그런데 5군은 적극적으로 적과 싸우려 하지 않았다. 후군병마사 유돈식이 홀로 출발해 [[교하동|교하]]로 향하자, 중군병마사 오응부가 사람을 시켜 알렸다. >"지금은 거란군이 [[적성]](현 [[파주군]] [[적성면(파주)|적성면]])에 모여있으니 교하로 가지 말고 회군하라." 그러나 유돈식은 듣지 않았다. >"사군이 우리와 함께 가서 적을 쳐야 한다." 오응부는 할 수 없이 유돈식을 따라 4군을 이끌고 갔지만 적성에서 적을 보지 못했다. 이에 최충헌이 직접 고종에게 이들의 처벌을 건의했다. >"오군이 머무른 채 싸움을 하지 않으면서 군량만 낭비하고 있습니다. 오응부를 파면하고 최원세에게 그를 대신하게 하고 김취려를 전군병마사로 삼으소서." 고종은 이에따라 오응부를 파면했고 나중에 유돈식 역시 탄핵당하자 그의 직임을 면직시켰지만 유돈식이 최충헌의 생질인 점을 감안해 파면은 하지 않았다. 이무렵 태조탄에서 중상을 입고 치료 중이던 [[김취려]]는 명을 받고 전군병마사에 부임해 최원세와 함께 법천사로 진군했다. 그들은 [[충북]] [[제천시|제천]]의 보리골에서 거란군을 격파해 3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달현에서 거란군과 한바탕 격전을 벌였다.(달현 전투) 이후 5군의 보고에 따르면, 이때 좌군이 패하여 도망쳤지만 중군과 후군이 적의 배후로 밀고 들어가 마침내 거란군을 격파하고 수많은 수의 적의 목을 베어 죽였다고 한다. 그런데 대정 안팽조가 화살을 맞고 개경으로 달아나서 보고하길, '''"거란군은 고작 2명만 죽었고 나머지 죽은 사람은 모두 우리 군사였다."'''고 한다. 고려사에선 어느 쪽이 맞는 말인지에 대해 추가 설명이 없다. 다만 확실한 건 거란군이 [[경기]]에서 벗어났다는 것 뿐. 거란군은 다시 원주로 진군하여 공격을 가했다. 원주 관민은 온 힘을 다해 저항해 거란군을 아홉번이나 격퇴했지만 결국 10번째 침공에 무너졌고 원주는 그야말로 초토화되고 말았다. 이렇게 전쟁이 지지부진하던 사이, 또(!) 반란이 터졌다. 서경병마사 최유공이 군대를 이끌고 5군을 구원하려 했는데, [[최광수]]라는 군졸이 동료들을 선동해 서경으로 되돌아가버렸다. 최유공은 사졸들을 등쳐먹기를 좋아해 그들의 원한을 사서 병사들이 자신을 버리고 가는 걸 막지 못했고 그와 함께 서경군을 감독하던 [[예부]]낭중 김성은 술에 취해서 일어나질 못했다.(...) 그 후 최광수는 서경에 틀어박혀 무려 '고구려 홍복병마사'를 자칭해 [[고구려부흥운동]]을 전개했다. 이 반란은 최광수와 아는 사이였던 정준유라는 사람이 최광수에게 귀순하는 척하다가 소매에 숨겨뒀던 도끼로 쳐죽인 덕분에 조기에 진압할 수 있었다. 한편 [[김취려]], [[최원세]]가 이끄는 5군은 병력을 두 갈래로 나눠 적을 추격해 제천에서 적병을 격파했는데 물에 떠오른 시체가 강을 덮어 떠내려갔다고 한다. 사흘 후 박달현까지 진군한 고려군의 총지휘관 최원세는 김취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는 대군이 머무를 곳이 못된다. 산 아래로 내려가 진을 치겠다." 그러자 김취려가 반대했다. >"만약 적이 먼저 고개에 웅거하면 우리가 아래에 있게 될 것이다. 적이 들이친다면 날쌘 원숭이라도 지나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는가?" 이에 고려군은 고개에 올라 진을 쳤는데, 과연 거란군이 새벽에 고개 남쪽으로 진군해 좌우의 봉우리를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에 고려군은 최원세와 김취려의 독전에 힘입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고 거란군은 마침내 크게 무너져 동쪽으로 달아났다.(박달현 전투) 이후 고려군은 [[대관령]]까지 쫓아갔는데 병사들이 대관령의 험준한 지형에 겁을 집어먹고 진군하길 거부하는 바람에 주저앉고 말았고 거란군은 그 사이 대관령을 넘어 [[명주]](현 강원도 [[영동]] [[강릉]])로 진군했다. 열흘 후. 고려군은 대관령을 넘어 [[평창]]에서 적을 격파하고 명주를 포위한 적도 격파했다. 고려군은 이 기세를 몰아 [[등주]]까지 추격했다가 패했고 진주(陣主) 오수정(吳守貞)이 전사했다. 이후 거란군은 북상하여 동계 넘어 여진의 영토로 도망쳐버렸고 고려군은 더이상의 추격을 포기하고 방어진지를 3겹으로 구축하여 거란 유민들과 대치했다. 그런데 그 사이 김취려의 병이 심해지자, 부하들이 "돌아가서 병을 치료하라"고 청했다. 그러나 김취려는 거부했다. >"차라리 변경의 귀신이 될지언정 어찌 병을 가지고 수레에 올라 집에서 편안히 지내기를 바라겠는가?" 그러나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개경으로 돌아와 병을 고치라는 [[칙령]]을 내렸고 [[왕명]]으로 귀환해 몇달간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렇듯 고려와 거란 유민들과의 전쟁은 [[추격전]] 양상으로 전개되면서도 좀처럼 끝나질 않았다. 이때 전쟁을 결정적으로 결판지을 영웅이 등장하니, 바로 지난날 태조탄에서 패배를 초래해 파직당했던 [[조충(고려)|조충]]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